시대유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와 떨어져서는 인간다운, 인간적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이것은 분업, 협동, 협업 등의 효율적인 노동의 결과다. 거기에 더해 자본에 의한 효율성이 증대되면서 이루어낸 결과다. 인류가 이룬 문명이란 것은 노동 없이 유지될 수 없고, 자본 없이 이만큼 발전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가 나타나고, 계급사회가 사라진 것도 상업발달로 계급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였다. 계급은 현재에도 일부 남아있다. 역사적 흐름은 계급이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것이라고 본다.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더 합리적인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기존 혹은 과거의 불합리에 맞서게 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피의 혁명이기도 하다. 걱정인 것은, 자본주의의 발달로 오히려 계급이 생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갑질, 일진 등의 상위 계급(계층)의 폭력이 드러난다. 계급 간의 이동이 가능하다면, 계급의 존재는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다. 누구든 1등이 될 수 있고, 뒤에서도 1등이 될 수 있다면, 그런 위기감이 상대에 대한 존중으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위기감이 오히려 폭력성을 부추기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인간적으로 미성숙할수록 그렇다. 학교폭력이 좋은 예다. 싸움능력, 부모의 지위등에 의해 결정된 계급이 있고, 그 계급으로 모든 것을 차지하려 든다. 당장 졸업 후 사회에 진출했을 때만 봐도, 그런 짓을 할 수 없다. 오히려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스스로도 부끄러울 것이다. 지금껏, 그렇게 되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사회가 용인할 수 없게 되었다. 여러 사건들로 드러나고 있다. 연예인의 과거 잘못으로, 현재의 성취를 모두 잃게 되는 사건들이 많았다. 불타는 트롯맨 황영웅은 불탔다. 과거로 인해 재가 되었다. 많은 피해자들이 사회적 존재로 성숙했고, 그들이 연대할 수 있는 다양한 커뮤니티가 발전하게 되었다. 약자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이런 위기감이 상위계급이 하위계급을 존중하는 것으로, 하위계급이 폭력성으로부터 보호받는 형태로 변해갈 것이다. 역사가 그렇듯,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더 합리적으로 변해간다. 피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다. 사실 국가, 법치주의 등이 약자들의 보호하기 위해 변화되고 유지되었다. 법이 개인의 폭력성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필자의 고민
필자는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의 행동들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용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분석하고, 원인을 찾아내려 했다. 사회가 선의 의지를 가지고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려 한다. 그리고 한 사람의 사회일원으로 집단지성에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려고 한다. 건강도, 선의지와 행위에 영향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건강은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사회가 환경이기도 하다. 점점 파고들수록, 알면 알수록 나란 존재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그래서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사회적 동물이니, 여러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그 관계들의 합집합이 사회인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의 중심에는 나라는 존재가 있다. 인간수 X 인간수 X 인간수... 만큼의 관계가 있고, 이 관계들이 사회인 것이다. 건강, 환경, 국제관계, 마트, 배달서비스, 택배, 편의점 등등 내가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나와 관계를 맺고 있다. 때론 내가 인지할 수 없는 것도, 관계가 있다. 내가 인지할 수 없는 것뿐이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과,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도 관계가 있다. 멀리서 일어나고 있는 범죄도 나와 관계가 있다. 용의자란 얘기가 아니라, 사회문제라는 얘기다. 오늘 내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생각들은 종교적 깨달음과도 연결되어 있다. 특히 불교가 그렇다.
한편의 글로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으니, 차차 남겨보려 한다. 본 의를 드러내는 것은 위험할 수 있지만, 나의 안전은 익명성에 맞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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