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집단주의
학술적으로 접근해 보면, 선사시대부터 마을단위의 협동이 필요했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고, 사회밖에서의 홀로 된 인간은 생존조차 힘들다. 어느 집단(마을)이든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집단 간의 갈등에서도 특히 집단적 사고가 중요했고, 강화되었다. 많은 이슬람국가에서도 나타난다. 일본도 가장 집단주의인 나라 중 하나다. 관계주의의 한국과 다른 그 역사나 환경을 살펴보려 한다.
일본의 집단주의가 강화된 이유
일본의 계급사회시절을 봐야 한다. 지배계층에는 영주와 무사계급이 있다. 다이묘와, 그 아래 사무라이가 있었다. 항시 칼을 차고 다녔으며, 영주에 뜻에 반하거나 역모의 틈이라도 보이면 피지배계층은 즉시 처형이 가능했다. 피지배계층에게는 두려움 자체였다. 정치라는 것은 공포에 의한 지배였다. 사무라이 계층을 눈여겨봐야 한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는 무신들이 천대를 받았다. 고려시대 무신정변으로, 무신들이 득세한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왕정으로 돌아왔고, 유교의 조선시대가 등장했다. 여전히 무신들은 천대받았다. 정치는 공포에 의한 지배도 있었지만, 법치가 완성되어 있었다.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다. 반면 일본의 사무라이는 쓰지기리라는 행위가 있었다. 야밤의 행인들을 공격하고, 목격자까지 모두 살해하는 행동이다. 또 하층민에게 모욕감을 느꼈을 경우, 즉결 처벌할 권한이 있었다. 증인으로 자신의 하인을 사용했으니, 무소불위의 살인면허권이다. 사실상 법치가 없는 수준이다. 개인인 나보다, 영주나 사무라이의 의중이 가장 중요하게 된다. 그들이 리더이며 집단이기도 한 것이다.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집단의 이익을 볼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어느 순간 다이묘간의 전쟁이 끝이 났다. 열도가 통일이 된 것이다. 그때 사무라이들의 야만성을 풀 때가 없으니, 밖으로 푼 것이 임진왜란이었다.
한국의 집단주의, 관계주의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호족들도 권한이 막강했다. 사무라이에 비하면, 야만성이 없는 수준이라 본다. 왕과 호족은 서로를 견제했고, 법과 명분으로 정치적 판단을 했다. 유교에서 명분이라는 것은 사대주의도 있었지만, 백성을 위한다는 것이다. 비교적 자율적인 집단화가 가능했고, 공포에 의한 정치도 덜했기에 관계주의적인 사회가 된 것으로 본다. 서양과 달리 개인주의가 되지 않은 것은 감수성과 공감능력 때문이라 본다. 한국은 서양인과 달리, 내향적인 인구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서구는 내향적 인구 비율이 30% 미만. 한국은 반대로 내향적 인구비율이 75% 정도다.
집단주의적인 경향이 다시 나타난 것은, 일제강제점령기로 본다. 그 시대는 학교의 선생들이 칼을 차고 다녔다. 지배계층이 집단주의의 일제 군부였으니 말이다. 우리 역사 속에 사무라이 같은 야만적인 지배층이 등장한 것이다.
사무라이의 몰락, 일본군부등장
근대화 시대인 메이지유신 때 사무라이 계급이 해체되다시피 했다. 군부의 등장으로 필요성이 없어졌다. 군부는 신무기 총기로 무장했다. 칼을 쓰는, 야만스러운, 말 안 듣는, 살인면허권이 있는 사무라이는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들을 해산시킬 수 있는 총기로 무장한 군대라는 조직도 있었다. 근대화 법으로 법치가 강화된 것도 한 이유다. 일본 애니메이션 바람의 검심이라는 작품이 메이지유신 전후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사무라이 켄신의 이야기로, 켄신은 야만스럽지 않다. 하지만 모든 사무라이들이 켄신 같지 않았다. 켄신의 적들이 그 시대의 시대상이라고 봐야 한다. 결국 사무라이계급이 몰락하였지만, 그 야만성은 군부에 남았다. 사회에 집단주의적 성향도 남아있었다. 사무라이 중에 군부에 편입된 경우도 많았다. 사무라이계급이 해체되었지만,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것이 남았다. 사무라이들은 다이묘가 죽었을 때, 자결을 했었다. 그걸 지조로 여긴 것이다. 다이묘, 리더, 청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 목숨을 거는 것에 자부심으로 남았다. 자살폭격기인 가미가제전술 등으로 드러난다. 사무라이가 했던 일을 군부가 대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야만적인 군부가 우리나라를 일제강점기 때 지배했었다.
사무라이 정신은 거짓이다.
사무라이 정신은 미화되었다. 켄신도 한 예다. 분명 허구인 사무라이 이야기가 아름답게 그려졌다. 실제 사무라이들은 배신도 많이 했고, 쫓겨 다니면서 변방의 마을을 지배하기도 했다. 통치가 아니라 지배다. 그냥 요구했고, 들어주지 않으면 죽였다. 무사시의 이야기에서도 많이 드러난다. 일본도도 허구다.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철광이 없어서 해변에서 사철을 모아 제련했다. 불순물이 많았고, 강도가 약했다. 그래서 나온 게 독특한 방식의 일본도 제조방법이다. 실제로 근대화 시대에 군부에 보급했었지만 잘 부러졌다고 한다. 그래서 철도에 쓰이는 철강으로 군도를 만들어 보급했다. 군도가 일본도보다 튼튼했기 때문이다.
그 미화된 사무라이 정신에서 집단주의를 엿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극우세력이다. 천황, 일본의 명예, 이익을 위 할 경우 모두 참이다. 그 외에는 거짓, 적으로 간주한다. 시위를 할 때 야만스럽다. 미화된 사무라이정신을 일본의 혼이라고 여긴다. 실제 정치권에서도 나타난다. 선거 지역구를 자식세대에 물려준다. 원래 호족세력들이 정치인을 하고 있다.
마무리
집단주의는 공포에 의해 형성되고 강화되었다. 대표적으로 사무라이의 살인면허권한이다. 피지배계층은 살아남기 위해, 나보다는 지배층의 의중만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재등장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조선이 이룩한 법치에 비해, 일제의 지배는 야만적이기 때문이다. 학교선생이 칼을 차고 다닌 게 그 예다. 그냥 의심당하면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죽고 그랬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그 외에도 일본군성노예피해자. 강제징병. 강제노역. 조선말에는 평민들에게도 놋그릇이 보급되었었다. 유기그릇이라고, 황동그릇이라 쇠의 독소가 없는 그릇이다. 그걸 전쟁에 쓰일 탄피 만든다고 다 수탈해갔다고 한다. 예를 들면 더 들 수도 있지만, 가정집에 밥그릇도 뺏어갔는데, 뭔들 안 뺏어갔을까. 오죽했으면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났을까. 조선보다 살기 좋았다면, 그랬을까 싶다. 일부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답답할 노릇이다. 재밌는 건, 그들이 집단주의 성향을 띤다는 점이다.(다음글)
그들의 말대로 조선도 현대에 비하면, 야만의 시대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선은 일제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본이 총칼을 만들때, 조선은 민간에서 놋그릇도 만들었다. 어느 쪽이 더 살기 좋고, 평화로운 곳이냐. 일본이 무신지배를 할때, 우린 문신정치를 했다. 법과 시스템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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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집단주의 성향을 띄는 그들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역사를 왜곡하고, 친일이며, 자유를 부르짖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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