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먹거리 자원으로 보는 역사, 철학, 정치, 소고기라는 딜레마 속의 한 인간

by Epik 2023. 3. 19.
반응형

질문 : 인간을 인종으로 나누어 다르게 대하는 거은 윤리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생명체를 인간과 비인간으로 나누어 대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가?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면, 소고기를 먹는 것도 정당화되지 않는가? (from 전기가오리)

해당 질문지에 대한 답을 하면서, 추가적으로 든 생각까지 남겨보려 한다. 

소고기 앞에 장사없다.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소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된다. 나름 결과를 정해놓고 하는 사색이라, 필자의 편협함이 드러날 것 같다. 소고기 앞에 장사 없다. 다행히도 인간은 모두 편협하다. 어느 누구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은 헤아릴 수 없고, 아는 것에서 지혜를 짜낼 수밖에 없다. 진리에 도달하기엔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다. 그래서 우리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서로 비판하고, 의견을 나누는 방식을 채택했다. 편협함을 벗어나, 더 나은 결론을 얻기 위해서다.

역사 속 권력

인종차별에 대해 정당하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노예제도가 있었다. 그 이전 시대에는 정당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다음에 올 민주주의의 시대, 평등의 시대를 알 수 없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왕정은 철저하게 계급 사회였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느 왕국이든 소속되어 있어야 했고, 모두가 평등한 나라는 없었다.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나눠져 있었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 왕이라는 절대자를 지키기 위해, 힘은 움직였다. 모든 결정권은 왕이 가졌고, 귀족은 소유한 영지 내에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법에 근거해서다. 그들은 정치에도 참여했다. 여론이라는 형태로, 피지배계층은 정치에 참여했다. 지배계층은 불만이 많은 피지배계층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것도, 나름의 합리성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불합리하다면, 더 합리적은 세력에 의해 나라는 망할 수 있다. 그렇게 계속 전쟁과 혁명이 일어났다. 국가가 망하고, 새로운 국가가 탄생한다. 역사적으로 점점 더 합리성을 찾아갔다고 본다. 어느 시대에도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권력 싸움은 있었다. 지배층도 피지배층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들의 지지를 받아야 정치와 국가가 안정되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에서 이런 힘의 논리가 적용된다. 현대에서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많은 수를 얻은 쪽이 선택된다. 소수의 의견이 옳을지라도, 그렇다. 물론 구성원들의 수준에 따라, 소수의 의견이 존중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독재 국가인 북한 조차, 스스로를 민주주의 국가라고 칭한다. 북한의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 북한은 조선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이다. 대부분의 문제는 윤리적 옳음이 아닌, 힘의 논리로 결정된다.

철학은 진리 추구, 정치는 해결방식을 찾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여러 사회 문제들은 딜레마를 일으킨다. 더 정의롭기 위해서 고민하는 행위는 해답을 찾기도 하지만, 세밀하게 들어갈수록 점점 딜레마에 빠진다. 철학으로서 정의로운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딜레마에 빠진다. 철학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학문의 시초인 철학이, 현대에서 외면받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더 나은 선택을 위해서는, 철학적 고민이 반드시 수반된다. 역사 속 발전은 철학적 탐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철학은 멀리 있지 않다. 더 나은 선택을 위해 고민하는 것이 철학적 사고인 것이다. 파생된 여러 갈래의 학문분야 중에 정치라는 것이 있다. 정치는 짧은 시간 안에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수치화되는 것에 대해 적당한 값을 정해야 한다. 최저임금, 계층 비율, 도로의 제한속도, 벌금 등이 해당된다. 정치 또한 멀리 있지 않다. 죄에 따른 벌의 정도를 정하는 것도, 딜레마라면 딜레마다. 철학적으로 고민하고, 정치적으로 결정해서 법으로 정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조차, 법제화가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절도죄를 지었을 때, 최대 몇 년형을 선고할 수 있는지 법률로 정해두었다. 최댓값을 어떤 근거로 책정할 수 있을까. 죄의 크기는 수치화할 수 없으므로, 정답을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역사적으로, 다른 나라의 사레와 비교하여, 편협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식으로 적당한 값을 정한 것이다. 절도죄보다 살인죄가 더 무거운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대부분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유럽에서는 정치적으로 다투기도 했고, 미국은 내전까지 겪었다. 모든 사람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얻기 위해, 혁명과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그 원동력은 합리성. 윤리적 정당성이라 본다. 더 합리적이고 정당한 세상이 되길 사람들은 갈망한다. 때론 피 흘려서라도 이루고자 한다. 넬라판타지는 오직 투쟁만으로 도달할 수 있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합리적이고, 정당한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지지하고, 피를 흘렸을 때 비로소 그곳에 도달한 것이다. 소는 이런 투쟁을 할 수 없다. 윤리적 정당성이 있다 해도 말이다. 소의 생존권을 위해 대신 싸워줄 사람들이 있다. 채식주의자들은 그런 사람들인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투쟁보다 실천을 택한다. 나름의 솔선수범일지도 모르겠다. 야생동물은 스스로 살아간다. 인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소와 다른 점이다. 생존을 위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존중한다. 그리고 그들을 사냥하는 것을 제한한다. 야생동물이 사라지고 멸종되는 문제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삶을 존중하고, 지키는 것이다. 이것 또한 힘의 논리라 하겠다. 두려움에 기반한 해결점이 나온 것이다.

정치와 채식주의, 다시 철학적으로 소고를 먹자.

산란기에 물고기를 잡는 것은 불법이다. 자원 고갈이 두렵기 때문에, 적당한 기준을 정한 것이다. 언젠가 소를 해방시킬 수 도 있다. 우리 먹거리에 대한 충분한 공급이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 채식주의 식단이 연구되고 개발되고 있다. 하지만, 육식을 하는 것이 아이의 성장에 이롭다. 성인의 건강에도 유익하다. 최근 양질의 단백질의 중요성이 알려지고 있다. 지방의 누명이라는 tv프로그램으로 지방이 나쁘다는 인식에서 오히려 건강한 성분이라는 게 알려지기 도 했다. 탄수화물, 당 성분이 원인인 비만, 이로 인해 야기되는 질병들에 대해 다루었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의 균형이 중요한 것이다. 같은 성분이라도, 건강에 유익한 방식이 있다. 가령 정제된 탄수화물과 당은 면역력을 악화시키고, 인슐린 저항성을 낮춘다. 비만의 원인이다. 잘못 알려진 지식으로 인해 야기된 질환의 원인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편협함이 사회적 작용으로 지혜에 가까워진 사례이기도 하다. 또 정치적으로 육식이 허용된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살아있는 무언가를 섭취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다른 생명을 통해, 생명유지에 필요한 것들을 얻는다. 철학적으로 아무리 고민한다 해도, 이 명제는 참이다. 인간은 완벽히 윤리적인 생명체는 아니다. 늘 딜레마 속에 있고, 어떤 결정을 해야 한다. 육식 동물들이 살기 위해 사냥을 하듯, 인간도 살기 위해 사냥, 채집, 농업, 축산을 하는 것이다. 어디까지 먹는 것이 정당한지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결정이 된 것이다. 그리고 육식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많은 연구들로 증명된다. 법률로 징역 형량을 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이 자연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달리 말하면 빼앗은 것이다. 우리는 자연과 동식물들에게서 땅을 빼앗은 것이다. 자연을 자원으로 본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가 적당할지. 윤리적이라 할 수 있을지 정해야 한다. 그 정함은 두려움에 기반한다. 우리의 생존권에 더 도움 되는 쪽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벌목은 숲의 어디까지 할 것인지 결정하듯 말이다. 화석연료를 줄이자는 범지구적 합의하에 전기자동차가 개발되고 있다. 기업이 앞장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니즈가 생겨 제품이 나오고 있는 거다. 그 소비자가 자연에 대해 윤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고, 그 반대의 결정도 할 수 있다. 자연에 가장 유익하고, 윤리적인 행동은 모든 산업 활동을 멈추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소고기의 소비를 줄여야 할까. 소 대신 생선을 먹는다고 해도, 생선도 고갈되어 가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씨스파라시에 의하면, 원양어선이 해양자원의 씨를 말리고 있다. 돌고래와 고래는 일본이. 상어는 삭스핀 재료로 중국에. 과학자들은 30%의 바다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는 보호되는 바다는 1%도 되지 않는다. 거의 모든 바다에 중국 원양 어선이 있다. 식량위기가 올 거라 한다. 자연이 자원을 무한정 공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산업을 육성하고 발전시켜서, 생존을 위해 먹거리를 지켜내야 한다. 어업자원이 고갈되었을 때 대비해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돼지 콜레라나 조류 독감으로 해당 산업이 타격을 받을 때가 있다. 해당 자원이 사라지더라도, 다른 산업에서 부족한 량의 식량을 시장에 보급하게 된다. 식량자원이 안전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미래 식량난이 생기면, 더 많은 종을 가축화시킬 수 도 있다. 영화 설국열차처럼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바를 먹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윤리적으로 채식만 하거나, 굶어 죽느냐? 인간사회는 결국 딜레마라는 것을 인정하고, 골고루 먹느냐? 고민은 철학적으로, 선택은 정치적으로 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냥 딜레마를 안고, 소고기를 먹고 싶다. 야채, 고기를 골고루 먹는 것이, 건강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한 아이의 성장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응형

댓글